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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아모스와 대중문화의 만남(5)] 정의의 벡터맨

밝은터 2010. 1. 8. 08:46

지구용사 벡터맨
채널/시간 챔프 방송종료
출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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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 국내배우
출생 1973년 5월 23일
신체 키185cm, 체중72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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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라는 배우가 과거 '벡터맨'으로 출연한 것이 요즘 화제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벡터맨'은 지구의 정의와 평화를 지키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를 읽으면 정의라는 단어가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 모릅니다. 세 보지는 않았지만 수십 번 정도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정의’란 무엇입니까? 정의는 영어로 Justice입니다. 히브리어로는 Tsedaqah (쩨다카)라고 합니다. 성경을 기초로한 정의를 설명드리고자 하기에 히브리어 원어인 “쩨다까”가 무엇 의미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고 봅니다.

“쩨다까‘는 ’속박에서 건져내는 정의(Justice), 커뮤니티를 회복시키는 정의(Justice)‘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Justice라는 단어는 성경에 1천 회 이상 나오는데 대부분이 ”쩨다까“에 속한다고 성경학자들은 말합니다. 정의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비해 수십배 더 자주 성경에 등장한다고 하니 하나님이 ”쩨다까“를 얼마나 중시 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중시 하셨다의 시제는 현재 완료형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정의’하면 ‘나쁜 사람과 대적해 싸우는 일’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저 '벡터맨' 수준 정도만 생각했습니다. 미디어에서 나오는 정의에 대한 메시지는 주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저 악한 무리와 싸우는 일이 목표이면 결국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물론 아주 극한 상황에서는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폭력적인 정의로운 일은 정당화되기 어렵습니다.

정의를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속박에서 건져내고 커뮤니티를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근로자들이 있습니다. 고용주는 이들을 함부로 대합니다. 거의 노예 부리듯이 합니다. ‘정의’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근로자들을 속박에서 건져내고 커뮤니티를 회복시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정의를 실현시킬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럴 때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게 된다면 둘 다 이뤄내기 쉽지 않습니다. 그저 상호간에 감정만 더 상하게 되는 것이지요. 비폭력적인 저항, 평화적인 저항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마하트마 간디 선생,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 함석헌 선생 등은 비폭력적 평화주의를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유일하게 ‘정의’를 실현시키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시민들도 민주화 운동 당시 비폭력적인 저항으로 군사 정부를 항복하게 만든 경험이 있습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3.1 운동이 바로 비폭력적인 저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렸지만 극한 상황에서는 폭력적인 저항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폭력적인 저항을 최대한 시도해보고 협상과 모든 것이 막혔을 때 마지막 카드로 들고 나오는 것이니 처음부터 폭력적으로 나서면 그것은 진정으로 ‘정의’를 생각하는 사람의 행동이 아닙니다.

From the Pulpit
From the Pulpit by danny.hammontree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예를 들어, 히틀러 암살단이 조직된 것은 비폭력적 저항마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지막 수단으로 폭력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정의(Justice)의 정의(definition)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정의는 “쩨다까”이고 이는 ‘속박에서 건져내는 정의, 커뮤니티를 회복하는 정의’라고 했습니다.

정의롭지 않은 상황에 발생했을 때 우리는 이 개념을 염두에 두고 ‘부정’과 싸워야 합니다. 근로자가 부당한 대우를 당했을 때 이를 비폭력적으로 저항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겠고 이들이 다시 해당 업체에서 일하고 경영진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는 저항을 준비해야 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끊임없는 대화와 여론 조성을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고 평화 시위를 자주 해야 합니다. 어떤 행동을 할 때 ‘속박에서 벗어남’과 ‘회복’이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합니다. 이를 잊고 감정적으로 대처할 경우 ‘정의’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우리 사회는 정의의 사도 벡터맨이 필요한 게 아니라 예수님처럼 지혜로운 "쩨다카 맨'이 필요합니다. [밝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