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와 영성
사도 바울의 편지 비교(1)-대형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본문
His Name by loswl |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의 첫 유럽 선교지인 마게도냐 지역 빌립보 도시의 교회에 쓴 편지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고린도 교회와 비교하면 성숙도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창설된지 얼마되지 않은 것 같고 이방신을 섬겼던 사람들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반면 빌립보 교회는 복음을 받아들인 후 많이 성숙해져 바울의 ‘깊이 있는 편지’를 받을 만한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고린도 교회와 비슷한데 빌립보서의 메시지를 전하면 사람들에게 와 닿지도 않고 메시지 전달이 정확히 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빌립보 교회에 고린도 교회에 했던 메시지를 그대로 전하면 신앙 성숙이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빌립보서의 내용이 개인적으로 큰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되겠지만 교회라는 집단의 개념으로 읽을 때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개인 차원에서 메시지를 받는 게 아니라 교회라는 단체의 차원에서 읽을 때 제대로 된 해석을 하고 21세기에 적용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린도 전서를 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보다는 질서가 더 강조됩니다. 은혜와 자유가 녹아져 있기는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질서를 훨씬 강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유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이방신에게 다시 돌아갈 가능성이 큰 분별력이 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내에서 분쟁이 극심합니다. 온갖 죄로 인해 교회의 질서가 무너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어떤가요. 빌립보서 1장3절부터 5절까지 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 대해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내용을 살펴봐도 격려와 칭찬의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도전을 그들에게 던져줍니다.
사도 바울은 현재 감옥에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이라고 불립니다. 감옥에 있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비참한 상황입니다.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할 수 있는 게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감사가 넘칩니다. 감옥을 지키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어서 좋고, 세상의 소유보다 예수를 소유한 것이 더 기뻐서 좋고, 이런 상황에서도 가슴 깊은 곳에서 샘솟는 기쁨이 좋고, 빌립보 교회의 돌봄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고린도 교회 같았으면 사도 바울이 이런 메시지를 전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21세기의 교회는 고린도전서를 읽으며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언젠가는 빌립보 교회처럼 되어야겠다”고 희망을 품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고린도전서의 내용을 마치 교회 밖의 세상 일인 것처럼 말하면서 세상과 교회가 담을 쌓도록 하고 빌립보 교회가 자신들이 리드하는 교회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빌립보 교회같은 곳이 이 세상에는 있습니다. 드러나지 않게 빌립보 교회처럼 기쁨으로 움직여지는 교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눈에 보이는 교회들은 고린도교회의 모습입니다. 아직 성숙되기 전의 모습입니다. 빌립보 교회처럼 되기를 사모하다보니 설교자들은 빌립보서를 놓고 설교를 많이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게 목회자들의 꿈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빌립보서의 내용을 암송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빌립보서에는 유명해진 구절이 많이 있죠.
Epistles of the Apostles by simpologist
미국 교회와 한국 교회를 볼 때 대체로 고린도교회와 비슷한 모습입니다. 빌립보 교회같은 교회는 있기는 하지만 드물죠. 또한 그런 좋은 교회들은 사실상 드러나지를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마치 빌립보 교회인 것처럼 착각에 빠질 때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상은 빌립보 교회인데 현실은 고린도 교회이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빌립보 교회는 어떤 교회이길래 사도 바울이 좋아하는 것일까요.
먼저, 싸움과 분쟁을 해도 귀엽게(?) 합니다. 서로 복음을 전하려고 싸움을 합니다. 바울은 이를 귀엽게 본 것 같습니다. 1장18절에 이 같은 경쟁을 기쁘게 생각한다는 말을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나타나는 분쟁과는 차원이 다르죠. 고린도 교회에서는 나는 바울 편이다, 아볼로 편이다와 같은 걸로 싸움을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비슷한 모습이죠. 누구 목사 파다 누가 장로파라고 해서 분열이 일어나죠.
빌립보 교회는 또한 관용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4:5). 어려움 중에 자족하는 교회였습니다. (4:14). 사도의 사역에 참여한 유일한 교회였습니다. (4:15). 이 교회에서 무엇이 보이십니까? 저는 은혜와 자유가 보입니다. 관용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관용을 알게 됐음을 의미합니다. 바로 은혜입니다. 어려움 중에 자족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자유하다는 말입니다.
성숙해 있는 교회이기에 사도 바울의 메시지는 굉장한 깊이가 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1:2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2:5-11)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4:6)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3:20)
이런 내용을 고린도 교회에 전했다면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는 기독교의 기초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뿐입니다.
성숙한 교인, 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메시지는 이 땅에서는 낮아질 수 있고 염려하고 고통할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꽉 붙잡고 그에게 의지하면서 살아가다보면 죽는 날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초신자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내용입니다. 초신자에게는 ‘질서’를 말하면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꼭꼭 집어주는 게 조금 더 낫습니다. 빌립보서를 읽으면서 자신이 속한 교회가 빌립보서에 나온 내용들이 경험되어지지 않고, 그러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 골로새서가 훨씬 더 공감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좋은 교회를 판단할 때 교회 건물 크기, 교인수, 시설, 교회 프로그램으로 판단합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와 빌립보서를 읽으면서 빌립보서의 내용과 공감되는 부분이 많은 교회는 규모에 관계 없이 좋은 교회라고 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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