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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와 대중문화(21)] 이태원 살인 사건과 예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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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와 대중문화(21)] 이태원 살인 사건과 예수

밝은터 2009. 10. 30. 04:05

이태원 살인사건
감독 홍기선 (2009 / 한국)
출연 정진영, 장근석, 신승환, 고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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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조중필 사건과 관련된 영화가 제작돼 화제가 됐습니다. 조중필 사건은 이태원에 있던 패스트푸드점에서 대학생 조중필 군이 한국계 미국인 명에게 피살된 사건입니다. 명의 피의자가 있었고 하나가 죽였음에도 한미 협정에 따라 모두 무죄로 석방되는 억울한 사건이었습니다.

조중필 군의 가족 그리고 한반도는 살인자를 모른 아까운 젊은 생명을 잃었습니다. 이런 경우 신명기 21장에는 암송아지의 피를 뿌리며 죄를 이스라엘에 머물지 않도록 명령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유대인들의 전통이었습니다. 동물의 피로 죄를 씻어내는 일종의 제사였습니다.

성경에는 조중필 못지않은 억울하게 죽은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입니다. 그는 나무에 못박혀서 죽었습니다. 신명기 2122-23절을 보면 나무에 매달려 죽는 것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 것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식했고 그렇게 추앙되던 예수는 나무에 매달려 죽었을까요. 하나님은 그러한 죽음을 허락했을까요. 이는 그러한 역사를 통해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가 풀렸음을 알리는 일입니다.

죽을 죄를 범한 인간이 더는 나무에서 죽는 저주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표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억울하게 당한 죽음, 억울하게 잡혀서 종이 되는 , 미움을 받는 아내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억울한 등에 대해 측은지심을 보이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에 대한 원한은 땅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대신 짊어지고 나무에 매달린 자가 예수인 것입니다. 모든 억울한 자뿐만 아니라 크게 죄를 지은 자들을 대신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대속죄라는 기독교적인 표현입니다. 대신 죄를 짊어진다는 의미죠.

조중필 군의 억울함을 예수께서 지시고, 그를 죽인 두 한국계 미국인도 예수께서 그 죄를 지시고,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이의 죄도 짊어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죄인인지 알아야 죄사함이 있겠죠. 죄인이 없는데 어떻게 죄를 사해주시겠습니까. 그렇게 거짓말을 했던 두 명 중 한 명은 죄사함을 받을 수 없을 가능성이 큽니다.  

조중필 군의 부모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나님은 아픈 마음이 있는 자, 큰 죄를 지은 자들을 모두 품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다 주셨고, 다 품으셨고, 다 짊어지신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됩니다.

나 자유 얻었네, 너 자유 얻었네, 우리 자유 얻었네…..”라는 복음 성가가 있습니다. 이 복음성가를 R&B 스타일로 하면서 랩을 넣는다면 이렇게 불러야 할 것입니다. “나 자유 얻었네 (다 주셨기 때문에) 너 자유 얻었네 (다 품으셨기 때문에), 우리 자유 얻었네 (다 짋어지셨기 때문에)”

사단의 지휘하에 진행됐던 모든 일들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힘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사건 이후에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써 그의 이름과 능력을 사용하느냐입니다. 이미 사단의 활동을 제한한 후이지만 우리가 예수의 이름과 능력을 무시하면서 살면 사단은 여전히 활개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집중해 예수를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과 능력은 크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기적의 증표입니다.

그 예수가 단순히 선생님이거나 선각자였다면 우리는 자유를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기적이요,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자유를 주시려는 분임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결박에서 풀려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