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와 영성
사도 바울의 편지 비교(2)-사적인 편지 본문
Through The Cross by loswl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아끼고 기쁘게 생각하는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혼란의 연속인 교회라 사도 바울의 특별 기도와 관심이 요청되는 교회였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사도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는 아닌 듯합니다. 자신의 ‘영적인 아들’이었던 에바브라가 골로새 지역에 세운 교회로 보여집니다. 이 세 가지 다른 상황을 보면서 그가 어떤 관점으로 복음을 전했는지 비교하면 흥미롭습니다.
문제가 가득한 혼란의 교회(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그는 질서를 강조했습니다. 질서의 하나님을 염두에 둔 복음을 전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더욱 깊은 은혜와 자유를 경험할 수 있도록 편지를 썼습니다.
골로새 교회에 대해서는 자신이 세운 교회가 아니였기에 일반적인 교리와 권면이 주를 이룹니다. 골로새 교회는 그리스도를 깎아내리며 율법과 전통을 중시하는 이단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바울이 세운 교회였더라면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것 같은 좀 더 강한 어조로 글을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골로새서를 읽어보면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마치 신학교 교수가 잘 모르는 교회에서 강의를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줍니다.
골로새의 이단들은 유대 율법주의, 헬라의 철학, 동양의 신비주의를 모두 혼합했다고 학자들은 기록합니다. 실제 골로새서에는 그러한 내용들이 엿보입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가 이런 지경이면 그는 좀 더 감정이 섞인 투로, 좀 더 길고 장황하게 글을 썼을 것입니다. 골로새서를 그렇게 썼다면 아마도 골로새 교회의 반발이 있었을 것입니다.
비교적 점잖게 쓴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빌립보서, 고린도전서, 골로새서를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성경을 읽을 때 성경 저자의 상황과 독자의 상황을 항상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간에 교류됐던 편지글을 읽는 21세기를 사는 독자의 태도도 중요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하며 사도 바울의 편지글을 읽습니다. “사도 바울이 나의 멘토였더라면 나에게 어떻게 편지를 썼을까.” 내가 있는 교회에 편지를 썼더라면 어떻께 썼을까. 내가 속한 지역에 대해 뭐라고 편지를 썼을까. 내가 살고 있는 나라에 대해 뭐라고 했을까.
오래전에 기록된 바울의 편지를 통해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글을 쓰는 자(바울)와 읽는 자(골로새 교회 교인) 그리고 그 글을 엿보는(?) 자(성경 독자)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으면 우리는 엉뚱한 해석을 하게 됩니다.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재범 (박재범) / 국내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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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PM의 재범 군을 생각합니다. 마이스페이스라는 블로그에 친구와 사적으로 대화 나눈 어렸을 때의 글에 한국 전체가 들썩거렸습니다. 우리가 살펴봐야 할 것은 재범 군이 썼던 일종의 전자 편지 글은 친구에게 쓰는 사적인 글이었다는 것과 그것은 미성숙했던 10대 중반의 어린 아이가 쓴 글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빌립보 교회, 골로새 교회 교인들이 읽도록 사적인 편지를 썼습니다. 당시 교인이 많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사적인 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편지글이 정경이 되어 성경이 됐을 때 우리는 사적인 편지글을 보며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어떻게 이 글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생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마구마구 잡아넣는 사람이었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고 역사적인 기독교 선교사가 된 인물입니다. 그의 미성숙했을 때의 행동이 기록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사도로서 선교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두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바울의 사적인 편지글을 성경 66권에 넣도록 하신 것은 우리가 그 글을 읽으며 우리가 사는 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 근거를 주시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각 교회에 쓴 글을 읽으며 과연 우리가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석을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뜻’이 아닌 그 ‘말’을 그대로 옮겨서 적용할 경우 상당한 무리가 따르고 진리가 전달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우리가 사도 바울의 편지글을 우리 교회에 해석없이 그대로 전달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사실’을 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편지글은 팩트(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러나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그 당시 사도 바울에게 주신 주님의 마음을 읽으면서 그 뜻을 헤아리면서 해석한 내용을 전할 때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를 자유케하지 않지만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두 번째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바로 성숙하지 않았을 때의 글, 말, 행동을 갖고 너무 지나칠 정도로 매도하는 우리의 미성숙한 행동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과거 미성숙한 행동이 문제가 되어 그가 사도로서 일을 하지 못했더라면 기독교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당시 그런 문제가 지적되었을 것입니다. 실제 바울이 변화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회심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그의 과오가 용서되었기에 사도 바울은 예수님 이후 가장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과거(!)가 있던 사도가 쓴 사적인 편지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굉장히 중요한 이슈인 것 같습니다. 그런 관점으로 골로새서, 빌립보서, 고린도전서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실(facts)만 보던 눈에서 진실(truths)이 발견될 것입니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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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6 - 빌립보 교회와 고린도 교회(1)-대형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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