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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질 받는 스타들에게도 은혜의 물결이 본문

유명인

손가락질 받는 스타들에게도 은혜의 물결이

밝은터 2009. 4. 14. 07:47

성경: 로마서 3

도대체 무엇을 믿으라는 말인가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은혜, 구원, 죄 등을 논할 때 항상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믿음’(faith)’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믿으라는 말인가?”라는 질문을 단 한 번이라도 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인데 의로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논개가 몸바쳐서 나라를 구하려고 했던 것처럼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를 구해내셨는데그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논개에 비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이지만 비유적으로 본다면 그렇습니다. 우리는 논개의 의는 높이사면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비아냥거릴 때가 많습니다.

어떤 집단을 위해 대신 죽는다는 것은 숭고한 일입니다
. 아직도 좀 헷갈리실 것입니다. 뭘 믿으라는 말인가? 바로 죄인들에게 오셔서 대신 죽으셨던 의, 은혜의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게 믿겨집니까?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와서 죽을 수 있다는 말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슬람교는 예수님의 위대함을 믿고 그를 존경하지만 그의 신성은 부인합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는 믿음 없음입니다. 이슬람 교도들의 도덕성(극우주의자를 제외하고)과 율법에 대한 준수는 놀라운 수준입니다. 유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도무지 그들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도덕과 율법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하나님의 의가 그곳에만 있다면 인간은 모두 이슬람교와 유대교를 믿어야 합니다. 21세기의 상황에서는 그렇습니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말의 의미

그런데 사도 바울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법도 행동도 의롭게 될 수 없다고 합니다 (로마서 326).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합니다. 무얼 믿는다는 말입니까? 다시 말합니다. 죄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그의 의, 그의 은혜를 믿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심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은혜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심판을 하지 않으신다는 말이 아니라 그의 주된 성품(Major Personality)은 인내와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의 도덕성

행동과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로마서 320). 이렇게 말하면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들은 다음과 같이 반박합니다. “그럼 아무렇게나 살라는 말인가?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사도 바울의 말은 흑백논리가 아닙니다. 믿음 또는 행동이 아니라 무엇이 우선인가에 대한 말입니다. 믿음과 행동은 한 선상에 있습니다.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연속성의 출발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생기면 행동이 뒷받침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커트라인을 재밌게 그었습니다
. 믿음까지만 이뤄지면 의롭다고 칭한다고 했습니다. 즉 어느 미국 대학원에 입학할 때 토플 점수가 560점이 넘어야 한다고 할 때 560점을 받든 600점 이상을 받든 그 대학원에는 입학할 자격을 얻게 되는 것처럼 의롭게 칭함을 받는 것도 믿음으로 커트라인을 그어준 것입니다. 600점 받은 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중요합니다. 그러나 커트라인은 분명 560점입니다. 믿음도 그런 관점으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진화론적인 교육을 받았기에 600점이 아니면 제대로 된 합격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을 보고 판단하시는 하나님

항상 우리가 먼저 봐야 할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사람은 행동을 보고 믿음을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믿음을 보고 믿음을 판단합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옆에  함께 못박혔던 사람을 구원해주셨는데 그것은 순전히 믿음만 보고 그런 결정을 하신 것입니다. 못박힌 자의 행동만 봤더라면 그는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은혜를 믿는 것

아직도 헷갈리신가요? 무엇을 믿으라는 말인가요? 바로 죄된 세상에 오셔서 인간과 함께 호흡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 그런 그의 은혜를 믿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그의 은혜를 마음에 품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마다 나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럼 아무렇게나 막 살면 된다는 말인가요? 믿음을 갖고 나서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요?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믿음은 그냥 믿음이 아닙니다. 참기름이 있죠? 참기름을 사람들이 믿지 않으니까 순 진짜 참기름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바로 순 진짜 믿음입니다. 진짜 그 사실이 믿겨집니까? 진짜 가슴에서 느껴집니까? 진짜입니까? 그것을 보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그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중간까지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한 후에 마침내 믿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한 모습을 보고 믿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내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그에게 감격스러운 일이 됐고 그는 참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은혜가 은혜가 됩니까? 내가 받을 자격도 없는 것 같은데 나에게 무엇을 주고, 내가 잘못했어도 용서해주고, 끝까지 기다려주는 게 바로 은혜입니다.


지탄을 받는 이들도 용서하시는 하나님

유승준이라는 가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군대를 가겠다고 선언을 해놓고 미국 시민권자가 되어 병역 의무를 피했습니다. 그는 분명 잘못된 결정을 했습니다. 더 지혜롭게 선택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의 행동은 분명 문제가 있었습니다. 한국 남성들은 그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스티븐 유라고 놀려대며 그의 한국 입국을 강력히 반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나 그를 향해 손을 내밉니다. 너의 잘못은 이미 용서되었다고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승준만 용서하고 기다려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유승준보다 더 큰 잘못을 했어도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 인간 사회는 질서 유지를 위해 잘못한 사람을 처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용서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럼 이렇게 질문하는분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살다가 죽기 직전에 하나님을 믿으면 되겠네?” 이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죽기 직전에 믿는 것이 과연 보장될 것인가가 첫 번째 질문입니다. 믿음을 놓고 도박을 하는 것입니다. ‘순 진짜 믿음을 얻게 될 수 있을까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두 번째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받아들일 때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이 됩니다. 죽은 후에 하나님과 만났을 때 어떨까요?  두 가지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현명한 사람이라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적용

나는 과연 순 진짜 믿음이 있는가. 매순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죽는 그날까지 확인을 해야 한다. 영원한 생명을 놓고 벌이는 확인작업이다. 이는 시간이 아깝지 않은 작업이다. 오늘도 나는 그 작업을 해야 한다.


Think Deeper

성서를 명제(Proposition)으로 읽지 않고 이야기(Narrative)의 세계로 본다는 것이 진일보하면서도 돋보이는 변화이다. 성서를 명제로 이해하는 한, 성서는 교리적 진술을 위한 증거 본문(Proof text)으로 인용되는 자료집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성서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가 침묵하고 도리어 억압당한다. 또한 딱딱한 논리와 화석화된 역사로 인식하는 한, 성서 이야기는 삶의 이야기가 될 수 없다. <리차드 미들턴, 브라이언 왈시,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 P.407. 이 내용은 역자(김기현, 신광은)가 역자 후기로 쓴 것을 발췌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