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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서니 김과 인간의 양심

밝은터 2009. 4. 12. 03:53


성경: 로마서 21-16

신은 없다?

어제 쓴 글의 댓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렸습니다.

신은 없습니다... 당신이 신의 존재를 '안다'구요?? 당신은 신이 존재하는 것을 믿는 것을 믿을 뿐입니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요.”

그 분의 말씀이 맞습니다. 신은 없습니다. 그런데 한 마디 추가할 게 있습니다. 그분에게 신은 없습니다. 신을 경험한 자에게 신은 있습니다. 니체에게 신은 없지만 테레사 수녀님에게 신은 있습니다. (주: 니체는 신이 없다고 말한 게 아니라 이 세상에 신이 없는 것처럼 돌아간다고 말한 것임). 버트란드 러셀에게 신은 없지만 그의 딸(목사의 아내)에게 신은 있습니다. 신은 관계적입니다. 신은 기능적입니다. 예수를 보내신 신은 관계적이고 기능적인 신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관계는 이성으로 맺어지는 게 아닙니다. 성경이 있지만, 많은 사람이 성경을 읽지만 신의 존재를 알려면 관계가 맺어져야 합니다. 성경에 있는 글 자체는 이성이지만 그것을 읽는 사람은 신과의 영적인 교류가 이뤄지면 성경은 관계를 맺어주는 말씀이 됩니다. 이 세상의 일도 그렇습니다. 거의 모든 게 관계에서 이뤄지지 무엇을 많이 안다고 이뤄지지 않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성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오해가 전파되어 우리가 머리로 알 수 없는 신을 머리로 알게 끔 프로그램화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원래 인간은 양심이라는 게 있습니다. 양심을 바탕으로 의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물론 이성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성이 지나치게 부풀려졌습니다.

신을 인정하는 양심

    사도 바울은 로마서 214절과15절에 그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양심이 있어서 그것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양심은 하나님이 심어준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에 그런 게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도덕과 율법이 필요할까요? 이는 아마도 인간이 양심만으로 버티기에는 죄성이 강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도덕과 율법이 없으면 복잡한 인간 사회에서 질서가 무너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결국 가장 좋은 것은 인간이 양심대로 사는 것입니다.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사회인 것입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율법 없이도 율법을 실천합니다. 양심으로 살기에 사랑하지 말라고 해도 사랑하고 돕지 말라도 해도 돕습니다. 한국에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도 한국인들 중에는 착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양심 또는 신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복음이 들어와서 그 양심이 더욱 다져지고 강해져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마치고 민초를 위해 일을 했던 것입니다. 앞서 소개했던 버트란드 러셀도 신이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자신의 사위가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학비를 지원했는데 이는 양심에 바탕을 둔 행동입니다. 이성으로는 절대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될 분이었습니다.

양심을 가리는 교만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손가락질을 받을까요? 첫째는 양심을 실천하며( 2:13)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이들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사회에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둘째는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생기는 부조화로 이러한 현상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대형교회가 나쁘지는 않지만 덩치가 커지면 어쩔 수 없이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한 대형교회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교회가 커질수록, 내가 알려질수록 피할 수 없는 것은 교만이다. 교만은 그런 것과 패키지로 따라온다.” 교회가 크건 작건 하나님이 주시는 양심으로 회복하는 게 중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양심에 털났다

    양심에 털났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가 양심에 털이 나면 온갖 나쁜 짓을 저지릅니다. 그러면 근본 양심은 이것을 압니다. 내가 잘못하고 있음을 분명히 압니다. 믿는 자의 경우에는 성령께서 그것을 알게 해주려고 애를 씁니다. 원래의 양심에 성령까시 합세하시니 괴롭습니다.  이 때 우리는 두 가지 행동을 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남 탓하는 것입니다. 내 털난 양심은 그것을 숨기기 위해 남을 탓하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는 회개를 합니다. “, 내가 이렇게 양심에 털이 나 있구나.”하고 말이죠. 이럴 때 하나님께서 용서하십니다. (로마서 24).  그 용서와 인자하심을 깨달으면 내 양심도 회복이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경험한 자는 결코 신은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신이 없이는 경험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속적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정신적인 문제로 해석하더군요.

앤서니 김의 양심 회복

   신의 존재를 거부하더라도 죽음과 고통 앞에서는 신의 존재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앙일보 LA 2009 412일자 스포츠 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골프 선수 앤서니 김에 대한 기사입니다.

    앤서니 김은 경기 후 소감에서 "대회 첫 날 75타로 부진해 머리 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9일 자신보다 한살 어린 LA 에인절스의 유망주 투수 아덴하트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22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는 기사를 읽고 골프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됐다고 말했다.  앤서니는 "기사 맨 마지막 문장에 '미래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 22살이라고 해도 말이다. 때문에 매일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가야 된다'고 써 있었는 데 마음에 와 닿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내 평생 꿈이 매스터스에서 한 번 쳐보는 것이었다. 사실 인생에서 보기나 3퍼트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여기 나와서 골프를 친다는 것 자체가 내겐 큰 기쁨이라는 걸 잠시 잊었던 것 같다" "오늘도 이런 마음가짐으로 경기에 임해서 버디 11개를 잡은 것 같다"고 담담하게 밝혔다.” [원문 기사 보기]

    남의 죽음을 보면서 그 안에 있던 양심이 살아난 것입니다. 원래 그 안에 있던 양심은 스포츠를 통해 기뻐하고 감사하고 초월적인 경험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회에서 주는 메시지가 온통 성공, 승리, 돈이니 그의 양심에 부정적인 영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죽음과 육체적인 고통은 메가폰 역할을 합니다. 양심 메가폰.  양심 메가폰을 든 존재는 바로 신입니다. 신이 없으면 양심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인간 스스로 양심을 작동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양심에 털난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 우리에게 다가올 게 있습니다. 바로 심판입니다. 신의 심판입니다 (2:5). 그럼에도 심판권이 있는 신은 인내하며 끝까지 기다려주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2:4). 기회는 있습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털난 양심을 계속해서 제거합시다. 죽는 그날까지.

적용

    개인적으로 양심에 꺼리끼는 일이 많이 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다 내놓고 양심 회복을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래 심어주셨던 그 양심. 홀가분하지는 않다. 여전히 내 안의 양심이 털이 나 있기 때문이다. 오늘 그 털난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싶다. 종일 회개의 기도를 하고 싶다.

Think Deeper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바로 그런 깨끗함에 대한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주여, 깨끗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부르짖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깨끗함과 정직함의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께는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깨끗함의 능력이 아니라 깨끗함에 대한 갈망입니다. [김동호 목사, ‘깨끗한 크리스천’, P.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