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와 영성
욘사마를 통해 본 복음 (로마서 1장1절-7절) 본문
말씀: 로마서 1장1절-7절
복음은 무엇일까(롬 1장1절)
복음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교회를 다니시지 않거나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복음’이라는 말을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분은 없을 것입니다. 복음(the Gospel)’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매우 반갑고 기쁜 소식’이라고 나옵니다. 매우 반갑고 기쁜 소식은 우리를 정말로 기쁘게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 반갑고 즐거운 소식이 그렇게 들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반갑고 기쁘게 설명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많은 이에게 굴레가 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배우 배용준 씨가 ‘욘사마(the lord Yon)’로 불립니다. 왜 욘사마가 되었을까요? 일본 여성들에게 ‘복음’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겨울 연가(Winter Sonata)’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배용준 씨는 일본 여성들에게 ‘따뜻한 남자’ ‘돌봐주는 남자’로 비춰집니다. 물론 그것은 드라마 주인공에게 부여된 허상입니다. 그럼에도 남성우월주의적 사회에서 배용준이라는 배우가 던지는 메시지는 그야말로 ‘복음’입니다. 매우 반갑고 즐거운 소식인 것입니다. 최근 한류에 관한 영문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학자들은 ‘겨울 연가’라는 드라마가 주는 메시지는 그야말로 ‘복음’ 수준이었다는 데 동의합니다. 제가 아는 대만 여성은 ‘대장금’이라는 드라마를 4번이나 봤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드라마에도 역시 매우 반갑고 기쁜 소식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진짜 복음을 갖고 있는데도 전하지 못함
성경은 ‘진짜 복음’을 담고 있지만 이것을 일부 교회와 교회 리더들이 ‘복음’으로 전하지 않고 ‘부음(訃音)’으로 전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들은 복음을 제대로 전합니다. 부음은 모두 아시겠지만 ‘사람이 죽었다는 기별’입니다. 이상하게 복음을 들어야 할 우리는 ‘부음’을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교회에선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데 왜 우리에게는 ‘부음’처럼 들릴까요. 왜 그럴까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 복음이 전해지는 게 아니라 ‘내가 복음’이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든 복음이 바로 ‘내가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복음의 의미를 분명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욘사마(the lord Yon)가 일본 여성들에게 ‘주(the lord)’가 된 것처럼 예수님은 크리스천에게 주(the Lord)가 되시는 것입니다. 겨울 연가가 따뜻한 남자, 따뜻한 사랑의 메시지를 전해줬다면 예수 복음은 영원한 생명과 기쁨의 소식입니다. 욘사마(the lord Yon)의 비유를 통해 사람들이 the Lord Jesus 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 복음이 더 아름다운 이유
예수 복음이 ‘욘사마 복음’보다 더 귀하고 아름다운 이유가 있습니다. 매우 반갑고 기쁘게 들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욘마사가 드라마에서 주는 기쁨에 비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와 은혜(롬 1장7절)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있어도 평화와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너는 앞으로 문제가 없을 거야”가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와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때론 힘들고 죽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순간이 분명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때에 예수 복음을 접하면 다시 평화와 은혜를 예수께서 주십니다. 일본 여성들은 ‘욘사마 복음’을 믿고 순종(롬 1:5)하고 그를 추종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더 큰 기쁨, 영원한 평강을 주는 예수 복음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우리에게 줍니다. 체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사실 말로 표현해도 알 수 없습니다. 체험해보시고 싶으십니까? 지금 눈을 감고 예수께 간절히 기도해보십시오. 당장 무슨 변화가 없는 것 같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는 진정으로 신실한 우리의 주(the Lord)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가장 어려울 때, 가장 바쁠 때, 가장 고통 받을 때, 우리 삶 속에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적용
은혜와 평화의 복음을 듣고서도 삶 속에서 그것을 누리고 살지 못했습니다. 하루 24시간 중에 나는 그 은혜와 평화를 얼마나 누리고 살고 있을까. 누리지 못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는 나를 보면서 좀 더 복음을 생각하고 은혜와 평화를 누리길 기대해봅니다.
Think Deeper
창녀나 세리들은 그 분이(예수님이) 그들의 직업적 평판에는 관심이 적은 대신 그들의 영혼에 담긴 슬픔과, 그들의 삶을 이 지경으로까지 몰고 온 사망의 악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갈망을 더 주목하신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깨끗한 영혼을 원했고, 예수님은 용서와 구속을 통해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것이 그분의 복음이었다. <고든 맥도날드,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삶,’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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