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와 영성
TV에 미니시리즈, 인생에 고통시리즈 본문
인생은 고통의 연속입니다. TV 드라마에 미니시리즈가 있다면 인생은 고통시리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음의 상처, 고통, 소외감, 거절감, 실망, 배신, 고투 등이 시리즈로 우리를 찾아옵니다. 지난주에도 우리는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고통이 없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고통이 밀려드는 것일까요.
아내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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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선배들은 고통을 어떻게 말했는지 궁금했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멘토링이 도움이 됩니다.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19절. 이하 표준새번역). 이 말을 한 후에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이에게 다 맡기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21절-23절)
예수님도 고통을 당하셨던 분인데 그는 고통을 결코 즐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해주십시오” (마태복음 26:39)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도 고통을 비껴나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고난을 당하면, 고통을 당하면 당황하게 됩니다. 온통 축복 마인드를 갖고 있는 분은 고난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영성이 있는 자들도 고난을 기뻐하는 상황이 아니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초기에는 선생 예수의 고난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은 고난과 고통입니다. 이는 죄를 대신 지는 자의 고난과 고통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한 이후에 사도들이 예수님의 고통 짊어짐을 이어 받기 시작했습니다.
IVP에서 발행한 신학사전(IVP New Dictionary of Theology)에서 ‘고난(Suffering)’을 찾아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구약은 순종의 대가로 번영을 약속한 반면,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기대(expect)하셨고, 사도들도 그러했다.”[1]
이러한 고통에 대한 ‘신약적 생각’은 21세기 들어 우리에게 더욱 가깝게 느껴집니다. 현대 사회에서 지식인들은 “이성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선언하고 그 해결방법을 찾는데 온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에 들어서면서 이성도 불완전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고통은 이성, 과학, 의학으로 완전히 해결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때 예수님과 사도들의 복음은 우리의 마음 깊이 파고들어옵니다.
고통은 과거의 죄나 잘못에 대한 대가로 받을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통과 고난은 미래지향적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고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잠시동안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기뻐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단련하셔서, 불로 단련하지만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되게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해주십니다.” (베드로전서 1장6:7) 히브리서에도 고통에 대한 미래지향적인 말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히브리서 5:8) 예수님은 또한 고난으로써 완전하게 되셨습니다.(히브리서 2:10) 사도 바울은 육체의 고난을 통해 교만함이 수그러들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7)
바울도 예수님처럼 고통을 원치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도 고통을 즐기는 이는 없습니다. 모두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8절에 보면 바울은 육체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그러나 그의 기도에 다음과 같이 응답하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고린도전서 12:9)라고 답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통에 대해 사도 바울이 받은 응답입니다. 호크마주석은 바울의 고통과 간구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바울의 간구를 거절하신 이유는 당연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역설적이다. 즉 바울이 인간적인 약점이 없다면 그의 사역이 그 자신의 능력으로 잘못 이해되어 자고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그를 신처럼 떠받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약점을 지님으로써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능력이 오직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자각하게 되어 겸손하게 된다. 이로써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는 은혜의 원리가 그에게도 적용되어 바울은 끊임없이 그 은혜의 원리를 따라 살게 되는 것이다.”[2]
우리는 이런 내용을 알면서도 여전히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인간의 본능적 바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과 고통에는 위로가 있고 그 위로가 다른 고난과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다고 권면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 3절-6절)
J.I. 패커, 싱클레어 B. 퍼거슨, 데이빗 F. 라이트 등 뛰어난 신학자들은 자신들이 편찬한 IVP 신학사전에서 고난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뛰어난 인사이트(insight)를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타락한 세계에서 타락한 인류에 속한 결과로써 고난을 당한다. 이 점에서 그들의 고난은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들도 자기들의 잘못 때문에 고난을 자초할 수 있다. 그들도 슬픔과 가난과 질병과 죽음을 겪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고난 속에서 구원을 받지, 그러한 고난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온 인류와 함께 그러한 고난을 겪으며 그러한 고난에 취약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고난을 쓰신다는 것과, 그들이 고난을 당하는 자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나머지 인류과 크게 다르다. 히브리서 12:5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에 무관심하거나 고난을 당할 때 낙심하지 말라고 훈계하면서,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징계하시는 목적은 그들을 연단하셔서 하나님 나라에서 쓰임을 받을 자격을 구비하도록 하시려는 것이라고 말한다.”[3]
고통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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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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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라는 책에서 고통에 대해 다음과 이야기합니다. 그는 “고통의 가능성은 영혼들이 서로 마주치는 세계의 존재 그 자체에 이미 내재되어 있습니다. 영혼들이 악해질 때에는 틀림없이 이런 가능성을 이용하여 서로를 해치려 들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겪는 고통의 5분의 4는 여기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고문과 채찍과 감옥과 노예와 총과 총검과 폭탄을 만든 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우리의 가난과 과로는 자연의 심술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내지는 어리석음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4]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인간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고통 역시 많이 있습니다.
존 골딩게이의 설명은 고난이 단순히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님을 알게해 줍니다.
“고난에 대한 구약의 태도들의 다양성은 하나님이 서로 다른 상황들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고난에 개입하였을 가능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때로 하나님이 죄를 벌하시는 것일 수도 있고, 때로는 어떤 교화 목적을 수행하시는 것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자의적으로 행하시는 것일 수도 있고, 때로는 다른 이들을 위하여 긍정적인 목적을 갖는 불유쾌한 경험을 사람들로 하여금 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오게 되는 고난을 겪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일 수도 있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오게 되는 고난으로부터 미래의 구원을 약속해주는 것일 수도 있다.”[5]
어떤 상황이든간에 “전능하신 하나님은, 능치못할 일 전혀 없는 하나님은 왜 이처럼 못된 인간들이 동료들을 괴롭히는 경우를 그토록 엄청나게 허용하실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C.S. 루이스는 ‘연약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우리에게는 천국에의 소망이 있다’고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 변증가인 조시 맥다월 목사도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고 고통과 고난이 있지만 그것은 한시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꿈꾸는 파라다이스로 가게 될 것”[6]이라고 했습니다.
저명한 신약신학자였던 G.E. 래드는 유명한 책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서 “하나님 나라(천국)는 예수님 공생애 3년 동안 핵심 메시지였다”[7]고 설명했습니다. 결국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고통과 고난을 접하면서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고통과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하나님 나라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겨자씨처럼 우리에게 다가 와 있다는 것입니다. 래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와 있지만 악인과 선인은 함께 한 사회 속에서, 한 단체 속에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까지 공존하는 것입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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